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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 누명' 무죄 판결 후 4억원 배상판결 미주 한인 홍윤희씨 항소

"60년 넘게 간첩누명을 쓰고 살았는데 4억 원이라니요…." 한국전 당시 간첩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했다 지난해 무죄 판결 후 최근 4억 원의 배상판결을 받아 화제가 됐던 홍윤희(83)씨〈본지 6월25일자 A-1면>가 항소를 했다. 한국에 머물고 있는 홍씨는 1일 본지와의 전화 인터뷰를 통해 "돈이 문제가 아니다. 내가 제공한 첩보로 인해 국가가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을 뿐"이라고 항소 이유를 밝혔다. "누명을 쓰고 감옥살이를 했다고 몇 십 억 원을 배상해준 적도 있는데 4억 원이 무슨 말입니까? 저는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북한군을 탈출해 첩보를 알려준 사람입니다." 그는 100억 원 이상의 배상금을 목표로 하고 있다며 돈을 받게 되면 사회 공헌에 사용하겠다고 말했다. "이 나이에 그 돈을 받는다고 무덤으로 가져가겠습니까? 이미 사회 공헌 계획도 세워 놓았습니다." 홍씨는 지난해 2월, 63년 만에 무죄판결을 받아내기 전까지 가족에게도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지 못했었다고 힘겨웠던 삶을 털어놨다. "유신정권으로부터 도망쳐 미국에 살면서도 아내와 자녀들에게 제 과거를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가 없었죠. 무죄판결을 받고서야 모든 걸 고백했습니다. 타의에 의해 이민생활을 하면서 자녀가 한국말을 못하고 한국문화를 모른다는 것이 너무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홍씨는 한국 프로야구 탄생의 숨은 주역중 한 명이기도 하다. 1973년 미국으로 건너와 샌프란시스코에서 살던 그는 메이저리그 야구를 접하고 한국에도 국민이 여가를 즐길 프로 스포츠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1975년 한국으로 돌아가 야구인들을 설득, 한국프로야구준비위원회를 만들어 초대 회장에 취임했다. 당시 정부의 반대와 대한야구협회의 비협조로 무산되고 말았지만 홍씨가 만들어 놓은 '한국성인야구재건안(한국직업야구계획)'을 토대로 1982년 마침내 한국 프로야구가 출범할 수 있었다. "빨갱이로 몰려서 징역을 살고 미국으로 도망치듯 건너왔지만 항상 조국의 발전을 위해 기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습니다. 프로야구 준비 작업도 그래서 시작했고요. 프로야구는 이미 생겼으니 다른 분야에 배상금을 사용할 생각입니다." 재판이 끝날 때까지 한국에서 머물 예정이라는 홍씨는 앞으로 자신과 같은 피해자가 나와선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국가적인 공을 세운 사람을 반역죄로 모는 이런 일은 두 번 다시는 없어야 합니다. 재발 방지를 위해 한국에서 뜻있는 분들과 다양한 활동을 펼칠 계획입니다." 신승우 기자

2014-07-01

'북한 총공격' 알리고도 '간첩 옥살이'…억울한 한인

한국전 당시 간첩으로 몰려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 무죄판결을 받은 가주 출신의 홍윤희(83.사진)씨가 이번에는 4억원의 배상판결을 받아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2부(부장판사 이인규)는 지난 24일(한국시간) "국가는 홍씨에게 4억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군인들이 홍씨에게 가혹행위를 하고 허위로 작성된 신문조서 등을 근거로 실형을 선고했다"며 "자신의 무고함을 밝히기 위해 홍씨가 노력한 기간, 국가의 불법행위 내용 등을 고려했다"고 공개했다. 1950년 7월, 당시 육군간부 후보생으로 입교하기 위해 육군본부에 대기중이던 홍씨(당시 20세)는 한강철교가 폭파되고 인민군이 서울에 침입하면서 고립됐다. 신당동 친구 집에 숨어 있던 그는 국군이란 신분을 숨기고 북한 의용군에 위장 입대했다. 위생병으로 대구까지 내려간 홍씨는 그해 8월 소속 인민군 부대가 부산 인근까지 남하하는 과정에서 '인민군 9월 총공격 지시'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8월31일, 목숨을 걸고 탈출해 국군에 귀순하면서 이 정보를 넘겼다. 홍씨는 유엔군사령부에서 이 정보를 브리핑까지 했으나 열흘 뒤 그는 간첩 혐의로 연행됐다. 그리고 온갖 고문 끝에 기소돼 사형선고까지 받았다가 두 차례 감형으로 55년 출소했다. 석방된 그는 정부의 감시에 못 이겨 1973년 아내와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다. 수퍼마켓과 식당 등을 운영하며 이민자의 삶을 살던 그는 1989년 일본 사학자 고지마의 '조선전쟁'을 보게 된 계기로 본격적인 자료조사에 나섰고 지난 2012년에는 한국을 방문해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한국전쟁사 자료인 '로이 애플먼 컬렉션'을 살펴보게 됐다. 이 컬렉션에서 1950년 당시 자신이 인민군 9월 총공격 계획을 제보했고 미군이 이를 중요 정보로 취급했다는 정황이 담긴 메모를 발견했다. 홍씨는 이 메모를 근거로 재심을 신청했고 결국 서울중앙지법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지 63년 만인 지난해 2월 홍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당시 홍씨는 재판 결과에 대해 "절반의 성공에 불과하다. 가장 중요한 시기에 나라를 도왔다는 진실을 입증할 것"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결국 한국전 발발 64주년을 앞두고 발표된 이번 배상판결로 인해 그는 조국을 배신한 '간첩'에서 '목숨을 걸고 중요한 첩보를 제공한 애국자'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신승우 기자

2014-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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